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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일 목요일

【518 역사강의 – 5월 18일, 북한군 소요유도 요원들과 한국군 고정간첩 장성들】


북한은 월남이 패망한 이후에 남침을 하기 위해 광분했으며, 베트남 식 통일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도시 게릴라 전 연구에 몰입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과 파리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과 북 베트남 군이 남 베트남에서 철수를 한 후, 정규군을 도시 게릴라로 위장해 남 베트남에 주둔을 하면서 일거에 남 베트남을 없애기 위해 카톨릭 신부들을 동원해 민족, 자주, 독립, 평화 란 단어를 앞세워 상당한 기간을 준비한 것 입니다. 
전면 남침을 하기 위해 남 베트남에서 주둔 중이던 병력이 발각되자 자체적으로 발생한 게릴라들이라고 발뺌을 하는 등 관련을 전면 부인을 하면서, 남 베트남 정부 곳곳에 간첩을 잠입시켜 기습 준비의 강도를 높여 나간 바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북한 대남공작부서에 이 같은 베트남 통일성공사례를 연구를 시키고 훈련을 시켜 북한에 특수부대를 만들고 반복적으로 다시 훈련을 시켜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고로 한국에 권력공백이 발생하자 즉각 남한에 파견해 도시 게릴라 전을 준비시키면서 그 동안 남한에 파견했거나 포섭했던 고정간첩들을 총 동원한 것이 바로 518 광주사태였던 것 입니다.

국민들이나 많은 518 연구가들이 5월 18일 광주사태 발발이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광주에 파견된 북한군들은 북한에서 광주 모형물들을 만들어 놓고 사전에 많은 훈련들을 반복적으로 하고 숙달시켜 남파를 시켰고, 남한에 있는 고정간첩들 뿐만 아니라 종북세력을 규합시켜 준비했던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조작한 518 수사기록을 근거로 왜곡된 발표를 하고 있는 것은 518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 반하는 것일 뿐 입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가끔 보는 북한군의 남침훈련 모습에서 남한의 지리가 적혀 있는 이정표 또는 청와대 모형물 들을 만들어 놓고 반복적으로 기습 침투 파괴를 하는 모습을 봤듯이, 광주에 남파된 북한군 600명도 광주의 모형물을 만들어 놓고, 작전을 해야 하는 곳의 모형물을 만들어 놓고 이정표를 만들어 놓고 반복적이고 되풀이 하는 훈련으로 작전대상 지형에 대해 감각적인 숙달을 했다는 것을 518 광주사태 당시 발생했던 각각의 사건을 분석해 본다면 누구나 다 확인이 가능 합니다. 

가령 5월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에게 돌맹이를 던지는 작전 전개와 도심 목적지로 정확히 가서 사전에 교육받은 유언비어를 신속하게 유포하는 것, 아시아 자동차 대형 주차장에 600명이 끊기지 않은 길을 이용해 침입해 생면부지 장소에서 10초당 차 한대씩 출동시킨 점 등등 을 보면 북한군들은 사전에 충분히 훈련과 교육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월 18일 광주사태가 전개 될 때 단 한 명의 북한군이 체포되지 않고, 북한군의 의도대로 광주시내가 불바다가 되기 시작하면서 피바다를 이룬 것은, 북한군과 고정간첩들의 철저한 사전 훈련으로 소요 유도 요원들과 그들의 도주와 작전을 엄호하는 요원들이 있었던 것이고, 이런 모든 정보를 북한군 지휘관인 이을설이 한국군 고정간첩 장성들을 활용해 진압군의 진압작전 까지 세워서 움직였기에 가능한 것이지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광주사태가 발생했다면 우왕좌왕 하면서 5월 18일 광주사태는 실패했을 것이고, 실제로 광주사태 이전 까지는 공수부대를 시위현장에 파견하는 것으로 시위가 종결되었기에 한국군 계엄사령부인 육군본부와 보안사령부는 단순 판단을 했었던 것 입니다. 

 한국군에서 최고로 훈련이 잘되어 있고, 진압능력이 뛰어났던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서 북한군이 의도한 대로 시위에 가담했던 광주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해서, 민심을 이반하게 만든 것이 바로 북한군 도시 게릴라 전쟁의 기본적인 전략에 공수부대가 걸려 들었다는 것이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확인을 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을 유도하기 위해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전남대 정문에서 대학생 100명이 죽었다, 여대생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등등의 유언비어을 살포한 것만 봐도 18일은 전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을 시키고, 공수부대원들을 먼저 때려서 부상자들을 다량으로 만들어 악에 바치게 만들어 소요 유도 요원들의 함정에 빠지도록 한 것이며, 확실한 작전을 위해 31사단장이 직접 악에 바친 공수부대 장병을 앞에 나서서 작전명령서가 아닌 구두로 연설을 해 끝까지 쫒아 가 체포해 오고, 시위는 철저하게 진압하라고 분위기까지 띄운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요가 시작되고 진압이 시작되자, 북한군과 한국군의 작전계획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북한군 사령관인 이을설이 도시 게릴라 전법대로 작전을 하므로써 진압군인 한국군은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 북한군의 의도대로 5월 18일 광주의 하루가 가게 된 것 입니다. 

2019년 8월 2일 강의 


2019년 7월 31일 수요일

【518 역사강의 –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내 소요 시작도 조작】


광주사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새롭게 전술적 개념으로 무장을 하신 독자님들께서 518 역사강의를 사건 발생 시간에 맞추어서 들으실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발생을 시간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조사가 미흡했는지 그리고 그런 미흡한 조사가 고의적이었는지도 각자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의 발발이 전남대학교 앞에서 오전에 등교를 하겠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충돌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고 있고, 수사기록에도 그렇게 기재가 되어 있음을 아실 것 입니다.

그런데,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고, 또 계엄령이 확대된 첫날인데, 이날 어느 학생들이 학교에 가겠다고 나설 것이며, 또 나섰다고 해도 공수부대원들에게 수백 명이 사전에 준비해 온 책가방에서 돌맹이를 꺼내 등교를 저지하는 10여명 정도의 공수부대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를 따져 봐야 하는데, 이날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한 공수부대원들이 학내에 있던 학생들을 모두 내 보내거나 수배학생들은 경찰에 인계를 한 상황이었고, 수배된 운동권 학생들은 모두 도주를 했거나 서울에서 열렸던 전국 대학생 회의에 참석을 하고 광주에 없었기에 운동권 학생들도 없었고, 학생간부가 없었던 상태에서 어떻게 불시에 공수부대원들을 향해서 정통으로 돌맹이들을 던져서 심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되어 추적하자 광주시내로 도주를 한 이후 시내에서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었던 전남대 앞 사건에서 학생 100여명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살포할 수 있을까도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이들 학생들의 신분증을 조사를 했습니까?

단지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교에 들어 가겠다고 말했고, 가방에서 돌맹이를 꺼내 던졌다고 해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공수부대를 공격한 사람들이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으로 확인을 해주었던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사실은 손톱만큼도 조사를 해 본 사실조차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시내로 도주해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여대생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하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파출소를 공격해 불을 지르고 소요를 확대해 나가자 31사단장은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 주둔지로 와서 시위를 철저하게 진압하고 시위자는 끝까지 추적해 체포하라고 지시를 했고, 그 이후 시내에서 경찰은 군대에 진압을 요청을 하고, 매를 맞고 많은 병사들이 심각한 부상 상태로 있던 공수부대원에게 31사단장이 직접 강경진압을 명령하고, 북한군 특전대 요원들이 학생으로 위장하고 고정간첩 1,000여명이 요소요소에서 이들 북한군 시위 유도요원들을 보호하는 가운데, 북한 시위 유도요원들 배치와 공수부대 배치를 다 알고 있는 진압 책임부대인 전교사에서 어떻게 시위 진압을 유도했고, 북한군 시위 유도요원들은 사전에 다 교육과 훈련을 받고 진압하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도록 유도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라면 경상도 군인들만 골라서 편성된 부대가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임에도 영상을 분석해 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막 퍼트리면서 군중을 선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실로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4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1980년 광주시내에는 600명의 북한 특수군들이 시위 유도 요원으로, 1,000여명의 고정간첩들이 이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그리고 진압을 지휘하는 전교사와 31사단 장성들이 북한군 작전 의도대로 진압군을 다루었지만, 정작 진압군은 600명의 병력에 불과해 적은 병력으로 넓은 지역에서 폭동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유도하는 북한군 시위유도 요원 작전에 말리면서도, 계엄 지휘부 장성들이 북한군 작전대로 의도적인 지휘를 하는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명령대로 움직여 휘발유에 불을 지르는 방식의 진압을 하므로 북한군 작전대로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북한군 600명, 지원하는 고정간첩들 1,000여명, 한국군 장성들을 포함한 고위장교들의 북한군 협조 사항이 사실로 밝혀진 지금, 필자가 확인한 5월 18일 광주의 시위 상황은 가설이 아닙니다.

이날 아침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시비를 했던 광주의 대학생 일부는 이을설이 강점한 도청에서 학생수습위원이 되어서 활동 한 것을 확인 했는데, 이들 학생들은 이런 사실로 보아 처음부터 북한군과 함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5월 18일 전남대 앞에서 충돌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학생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고, 40년이 지난 이후 모든 상황을 확인해 본 결과 북한군 2제대 300명이었고, 공수부대에게 명령했던 전교사와 31사단 장성들은 아시아 자동차 기습사건, 20사단 지휘부 기습사건, 무기고 경비포기, 교도소 습격, 주남리 공수부대 기습사건 등등을 확인 한 결과 사실로 밝혀 졌기에, 18일 북한군 시위 유도 작전에 협조를 한 것은 명백한 것 입니다.

따라서, 5월 18일 광주시내에서 벌어졌던 공수부대의 잔혹한 시위진압은 북한군의 광주사태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확인 했다면, 이후 광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도 똑 같은 개념으로 볼 수가 있어서 전남대 정문에서 광주사태를 발생시킨 장본인들이 대학생들이 아니란 것을 이렇게 근거를 갖고 알려 드리는 것 입니다.

2019년 8월 1일

2019년 7월 30일 화요일

【518 역사강의 – 원정 시위꾼들은 어떻게 광주에서 먹을 것을 해결했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체가 있는 물체는 무엇인가 섭취를 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졌던 광주사태에서 10일 동안 각종 시위에 참가한 수사기록에 기재된 특정한 세력들이 어디서 어떻게 누가 음식을 제공해서 먹고 지냈는지에 대한 조사는 커녕 언급조차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주목을 해야 합니다.

당시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집에서 밥을 먹고 시위에 참가를 하거나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고 쳐도, 그들이 집에 밥을 먹으러 갔을 때 가족들이 나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을 것은 뻔한 것이고, 실제로 광주사태가 끝나고 계엄당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못살던 어린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마지막까지 도청에서 저항을 했던 시민군들 상당수는 고교생, 재수생, 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을 봐도 정상적으로 광주에서 밥을 먹고 나갔다 들어오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아무튼 수사기관이나 국회 청문회 그리고 각종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할 때 이 부분 즉,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내에서 주거를 하던 사람들이 아닌 원정을 오거나 아예 다른 지역에서 와서 상주를 하면서 시위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지냈는지에 대한 조사는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인간은 밥 한끼만 걸러도 힘을 쓰지 못하고 굶긴 것에 대하여 저항을 한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이 부분에 대한 조사는 반드시 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20만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참가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 상당수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광주 외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상당수는 집으로 돌아 갔다가 안 오거나 다시 오거나 했을 것이고, 아예 상주를 했었는데 그 상주를 했던 부류들의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연고대생 600명과 고정간첩들 1,000여명이랍니다

성인남자들 일인당 백미 200그램 정도를 한끼로 섭취를 해야 하는데, 힘든 시위활동을 밤을 새워서 지속을 했으므로 하루 4끼를 먹었다고 가정을 하면, 1,600명X4X10X0.2=12,800킬로그램의 쌀이 소요되었고, 저 분량의 쌀을 운반하고 밥을 짓고 밥을 날라 주었던 인력을 관리하는 조직이 별도로 있었고, 막대한 비용을 지출을 했을 것인데, 주로 김밥을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 급식에 대한 이야기는 21일 목포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선발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물을 얻어 먹고 밥을 얻어 먹는 사진이 등장하면서 시작되는데, 이런 이야기는 북한 특수군과 고정간첩들의 급식작전을 추진했던 조직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일 뿐 입니다.

또한, 비공식적으로 증언을 하는 518 당시 동원되었던 진압군인들에 의하면, 북한군들은 개인적으로 빳빳한 천원권을 한 다발씩 주머니에 소지했다고 하는데, 당시 택시 기본요금이 500원 정도 할 때 이니까 천원권 한 장이면 식당에서 식사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요즘 북한군이라고 소문이 난 광수를 찾아서 만들었다는 영화 김군 이야기도 광주천변에서 지냈던 1번 광수가 양아치였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관련자 집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는데, 이 점을 우리는 주목을 해 봐야 하는 것인데, 누가 집으로 양아치를 초대해 자주 같이 밥을 먹을까요?

자주가 아니라 3시3끼를 공급을 했던 취식을 담당했던 조직의 일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보고 조사를 해야 하는 것임에도 영화를 만들어 미화를 하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 인 것 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필자는 탈북자들의 518 참전설을 일축하고 있는데, 북한 사람들과 제3국에서 오래 인접해 지내 본 경험과 그들이 절대로 광주에서 어떻게 밥을 먹고 지냈는지에 대해 함구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광주에 온 것이 아니라, 518 광주사태에서 북한군 이야기를 논쟁거리로 만들어 김대중의 광주사태 관여 사실을 숨기려는 공작으로 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을 먹지 않고 살수가 없으며, 먹지 않고 전쟁을 못하고 전투도 못합니다.

자국 땅에서 작전을 했던 공수부대도 몇 일간을 전투식량으로 버티거나 굶거나 했다는데, 적지로 원정을 온 북한군들이 굶지 않고 10일간 왕성하게 작전을 해서 광주를 점령했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 취식을 전담했던 조직을 관리 운영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019년 7월 31일

【5`8 역사강의 –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면 지원부대는 어디에 있었나?】


군대 작전은 전투부대가 출전을 하게 되면 반드시 지원부대가 있어야 합니다,

장규전 부대가 되었던 특수전 부대가 되었던 전투부대가 출전을 하게 되면 반드시 군수지원 부대가 작전을 지원하고, 지휘부가 있어야 하는 것은 군작전 교리상 상식 중에 상식이기 반드시 518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광주에 왔었다면, 이들 부대가 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군수지원을 누군가 했어야 하고, 그 지원의 종류에는 주둔 및 은신 및 기동 그리고 식사 및 정보 전달은 필수였고, 이들 북한군이 작전을 개시하게 되면 작전에 소요되는 소모품을 지원해 주어야 하고, 이들 병력의 사고처리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북한군 600명이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작전을 했을 때 작전부대 600명과 지원부대였던 고정간첩 1,000 여명이 먹었던 쌀이 양이 무려 8톤 정도가 되었는데, 1인당 한끼에 백미 200그램을 산정하고 작전 중 이었기에 일일 4식을 먹었던 것으로 계산하면 그렇게 산출이 되는데, 이 이야기는 누군가는 북한군과 지원부대에게 취사를 고정적으로 담당을 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김대중 사조직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빼앗아 광주로 진주를 할 때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장면으로 방패막이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별도 즉, 북한군 취사와 별개였고, 그런 장면을 계획적으로 노출시켜 북한군의 정규취사 작전을 은폐를 했던 것 입니다.

또한, 북한군과 북한의 통신, 북한군끼리 통신, 북한군과 고정간첩들의 통신을 지원하고 전담했던 지원세력이 있었고, 북한군이 작전에 돌입해 학생들 가방과 돌맹이, 또는 낫과 도끼, 비표시에 사용했던 수건, 아시아 자동차 기습 시 사용했던 도로 절개절단 장비들, 20사단 지휘부 기습할 때 사용했던 장애물 설치 장비 들을 누군가 지원을 했기에 북한군 600명은 작전에 전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은 명백한 것 입니다.

518 광주사태는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북한군의 특수작전 형태에 대하여 많은 교훈과 증거를 남겨 주었고, 북한군의 작전 그리고 북한군의 전남도청 강점 시 통치방식에서 또한 많은 교훈과 물적 인적 증거들을 남겨 놓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그들이 바로 지원세력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군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을 했던 많은 고정간첩들이 그대로 다 노출이 되었으며, 그때 노출된 고정간첩들이 지금도 남한에서 고위직에 올라가 있었거나 올랐던 증거들도 수두룩하게 남겨져 있으며, 이들이 518 광주사태가 종결된 이후 지금까지도 온갖 북한의 대남공작에 앞장서 왔었던 증거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서 작전을 했다는 것은 518 당시 광주에서 가두방송으로 선전을 했었고, 그 600명이 각종 시위에 선동과 앞장을 섰고, 아시아 자동차를 기습을 했고,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했으며, 교도소를 습격했고, 전남도청을 강점을 했었다는 것은 수사기록과 각종 정보 보고서에 고스란히 기재가 되어 있기에 누구나 다 쉽게 알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518 수사기록에서 조목조목 다 북한군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연고대생 600명이라고 불리웠던 집단은 북한군이었고, 그들 연고대생 600명은 별도의 조직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연고대생 600명이 벌였던 각종 사건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들 연고대생 600명이 고정간첩 1,000여명의 지원을 받으면서 광주시내에서 벌였던 특수군사작전 이외에 광주시 외부에서 벌어졌던 사건 즉, 무기고 탈취 사건은 북한군이나 북한군 고정간첩 조직이 아닌 전라도 토박이들인 김대중 사조직 1,400여명이 별도로 동원되어 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북한군 600명이 아시아 자동차에서 10초에 한대씩 출동해 전라남도 17개 시군읍에 있었던 무기고에 차량들이 도착했을 때 즉각 빼어놓은 무기를 북한군이 몰고 온 차량에 적재하고 같이 탑승해 광주로 진입했기에 수사기록에도 동시 다발로 일시에 무기고가 털렸다고 기재가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40년 동안 수사기록에 기재된 4시간만에 17개 시군읍에 있는 무기고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시에 털렸다는 내용을 앞세워 북한군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주장을 해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주장은 군사작전상 전투교리상 인적 물적 시간적 요소들을 감안했을 때 절대로 성립될 수가 없는주장이며, 그런 주장이야말로 518 진실을 왜곡해서 김대중 사조직의 광주사태 개입을 고의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가 진행하는 518 강의는 북한군의 작전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분석해서 확인을 했기에 518의 진실을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019년 7월 30일 강의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518 역사강의 – 518 광주사태 발생의 배경】



< 들어가는 말 >

지금 대한민국에서 518 역사에 대한 분석과 그 분석에 의해 강의되는 내용은 모두 다 518 수사기록과 국회 청문회 기록 등에 기초하고 근거한 내용으로서 빙산의 일각 정도 또는 전혀 잘못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 합니다.

518 광주사태는 단순하게 폭동으로 규정되어 정의되고 있다가 다시 김영삼 정부의 특별법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재 규정 되어 정의되고 있지만, 518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들의 무장과정과 무기소지와 습득 과정이 전혀 조사가 되지 않았고, 무장된 시민들과 진압군의 충돌과정도 부분적으로 조사가 되었으며, 특히 무장된 시민들이 정규군을 기습해 1개 대대병력을 괴멸 시켰던 과정들이 조사가 왜곡되고 재판과정에서 허위진술이 자행된 것에 대한 조사 조차도 되어 있지않고 그대로 역사로 국민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행위라고 여겨집니다.

소위 518 연고대생 들이라고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불리어 졌던 600명의 괴한들에 대한 단 한차례 조사도 없이, 사실확인도 없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역사적 진실로 가르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서 필자는 제대로 된 사실조사를 군사작전 개념으로 전술적인 확인을 일일이 거쳐서 100% 검증을 해 새롭게 국민들에게 518 진실에 대한 역사를 알려 드릴 것 입니다.

518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518 진실을 역사적으로 제대로 밝히는 것에 대한 의무를 기피하고 방치하고, 일개 시민이 역사적 진실을 군사작전개념과 전술적 개념을 대입을 해 확인하는 노력을 탄압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518 진실을 알려드릴 것 입니다.

                   --- 518 광주사태 발생의 역사적 배경 ---

518 광주사태가 발생한 배경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의견을 내고 발표를 하고 있지만, 518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지금에서 사실 확인을 해 보면 많은 미사어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냥 김대중의 정권탈취 욕망과 북한의 적화야욕을 채우기 위한 군사작전을 통한 내란을 야기한 국지적인 게릴라 전쟁이었다고 확신을 합니다.

어떻게 북한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을 할 것이며, 김대중은 왜 집권을 하고 북한에 막대한518 전승비용을 지불했고, 518 유공자를 양산했는지 그리고 양산된 518 유공자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확인 해 본다면 김대중의 북한에 대한 보답행위와 지지일 뿐 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 한 예로서 518 광주사태에 참가한 당사자들은 518 광주사태가 종식된 지 4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963정의 총기와 171,000발의 실탄 또 수백발의 폭발물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지금까지도소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518 광주사태의 배경을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518 광주사태는 국가권력의 진공사태 와중에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김대중과 북한측의 군사작전이었다는 것을 518 광주사태 당시 벌어졌던 사건 하나 하나를 밝히므로 증명을 할 것입니다.

              --- 518 광주사태의 구성요소 ---

518 광주사태는 사건발생 당시 광주지역에서 가두방송으로 선전을 했던 연고대생 600명 즉, 북한군 600명과 수사기록에서는 밝혀지지 않거나 밝히지 않았던 고정간첩 1.000여명과 김대중 사조직 1,400명이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주축이었고, 그 반대쪽에는 진압군이었던 공수부대와 20사단 병역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대에게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하나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가는데, 이러한 사건의 전개에는 반드시 518 광주사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들이 꼭 등장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런 사건 전개를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가면, 구성요소들이 명백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이런 확인된 사실에 근거 해서. 1980년 5월 18일 518릐 사건 전개부터 강의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7월 25일 목요일

【518 진실 주장, 우익들의 이야기는 맞고 좌익들의 이야기는 틀린가?】



518 진실주장을 함에 있어서 우익들은 우익들의 주장이 맞고 좌익들은 좌익들의 주장이 맞다고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익들과 좌익들의 518 진실 이야기는 각각 다 맞는 것일까요?

좌익들의 518 진실주장은 518 당시부터 유언비어로 속았고, 이간질로 속았고, 같은 고향인 점을 이유로 사실을 알아도 말을 하지 않고 주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에 진실 주장과는 거리가 있고, 피해 사실과 규모도 피해를 당한 것은 맞지만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틀린부분이 상당히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익들의 518 진실주장이 맞는가 하면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익들은 북한군이 광주사태에 개입을 했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미 518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가두방송으로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로 내려와서 광주시민들을 돕고 있다고 광주에서 시위당사자들이 주장을 했는데, 그런 사실을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알아 낸 것처럼 주장을 해서 오히려 시위당사자들이 북한군 광주 개입설을 강력하게 부인을 하는 기폭제를 만들어 준 결과를 초래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광주사태는 북한군과 김대중 사조직의 합동작전이었음에도 북한군 이야기만 꺼내므로 인해서 정작 핵심인 김대중 사조직은 아예 물밑으로 가라앉아 존재감 마저 잊어지게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518 진실 주장은 좌우익 모두 가 다 틀리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을 하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가는 국민들 의식 수준이 따라와 주어야 할 것 입니다.

2019년 7월 24일 수요일

【좌, 우익 에게 있어서 518은 어떤 것일까?】


518 광주사태의 뒷처리를 잘못해서 한국의 모든 것이 다 침체되고 저하되면서 한국에는 좌익들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직시한 일부 우익인사들이 518 광주사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이런 우익인사들이 518 광주사태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오히려 좌익들을 도와주는 격이 되어서 한국의 미래는 점점 더 암울하게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518 광주사태는 과연 좌, 우익에게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땅에 몇 명이나 있을지, 어떤 정부기관이 있을지 궁금하지만, 아마도 단 한 명도 없고 단 한군데 국가기관도 없다고 장담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518 광주사태는 북한과 김대중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같이 기획을 하고 실행을 한 국가전복을 위한 내란사태 임에도 국민들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짐작은 해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고 국가기관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비밀을 쥐고 있는 북한과 김대중 사조직들은 518 광주사태에 대한 왜곡된 거짓정보를 집요하고 계획적으로 유포했기 때문에, 그런 거짓정보가 사실로 굳혀져 가고 있고, 그런 왜곡을 역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우익진영은 비밀을 쥐고 있는 측에게 가짜 수표를 받고 들고 있는 격이고, 좌익진영은 5만원권을 현찰로 다발로 쥐고 있는 형국이 되어서 518 이념 전쟁에서 우익들이 철저하게 패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런 형국에서 518에서 북한군이 개입을 했네 안 했네 하는 주장은 북한과 좌익들을 돕는 것인 데, 518 광주사태는 구성요소가 북한군, 김대중 사조직, 광주시민, 계엄군 임에도 구성요소를 광주시민과 계엄군으로 축소해 조사형식을 빌어 발표를 했기 때문에 518 광주사태는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18 광주사태의 진실은 북한군과 김대중 사조직이 국지적인 내란을 일으켜 최규하 내각을 조기사퇴 시키고, 특전사 병력 1개 여단을 몰살시켜 전두환의 집권을 저지하고 김대중이 정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 수단으로 광주지역 계엄사 장성들과 북한군이 합세해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노획해 사단장 차량을 이용해 아시아 자동차 군수장비를 약탈해 광주지역 계엄사에서 무기고 경비를 하지 않을 때 김대중 사조직이 무기고를 개방해 무기를 모아 집결시켜 기다리고 있다가 북한군이 아시아 자동차를 약탈해 몰고 온 군용차량에 집결시켜놓은 무기를 싣고 광주로 운반해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특전사 1개여단을 몰살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이 실패하자 다시 주남리에서 특전사 1개여단을 몰살 시키려고 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518 광주사태의 진실을 북한은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하고, 김대중 사조직과 전라도민들은 철저하게 숨겨야만 하기에 518 광주사태 진실은 왜곡된 것이고, 여기에 우익진영 인사들이 가세하여 북한군 참전설 만을 주장을 하므로 시간만 끌고 가게 되었고, 그 사이에 좌익들은 518 유공자 숫자를 늘려서 힘을 키워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입니다.

이제 이런 518 광주사태 진실을 알만 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알게 되었으므로 차원이 다른 방법으로 518 광주사태를 국민들에게 알려 드릴 것입니다.

2019년 6월 7일 금요일

【518 까 까 까 원조에 대하여 알아 봅시다.】



518 유공자 명단공개에 대한 본질 이야기가 나오자 많은 분들이 518 까 까 까 를 외치는 것이 왜 나쁜가 하고 따지고, 매연을 맡으면서 길거리에서 고생하는 것을 폄하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518 유공자 명단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고, 지만원 박사님이 광수찾기를 할 때 노숙자담요가 아닌 518 유공자 명단을 갖고 사진대조를 해서 유공자 사진과 광수들 사진이 맞지 않으면 광수들이 북한군이라고 확정을 하려고 했던 노력을 기울였으나, 보훈처에서 개인정보 보호법을 내세워 불허한 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만원 박사님 메일 참조>

물론, 지금도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를 하면 광수들과 비교를 해서 북한군 존재 여부를 확인해 518에서 북한군 참가 여부 논란을 종식시킬 수가 있지만 정부와 518 단체가 극렬반대를 하면서 무조건 민주화 주장만 일방적으로 되풀이 하면서 광수 찾기에 대한 비난과 폄하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셔야 합니다.

만일에 518 광주사태를 북한군이 김대중 사조직과 고정간첩들을 동원해 주도적으로 저질렀다는 사실이 확인되게 되면, 유공자란 신분은 모두 이적 행위자로 바뀌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진짜 유공자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까 까 까 했던 우익들은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북한군 600명 존재사실 보다 북한군 600명이 누구의 도움으로 한국에 잠입을 했고, 누구의 도움으로 군사작전을 성공시켜 광주를 점령했으며, 누구의 도움으로 어떻게 공수부대원 상당수를 살해했고, 누구의 도움으로 특전사 여단장인 장성을 생포해 군복을 벗기고 권총을 빼앗고, 팬티 바람으로 석방을 해 개망신을 주었는지 알아 낸다면 북한군 600명 존재가 아니라 작전일체가 드러나 할말이 없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18 유공자 명단을 까 까 까 하는 것은 좋지만, 진짜 유공자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2019년 6월 5일 수요일

【518, 5월 18일 특전사 무자비한 진압 배경에 대하여】

공수부대를 수십배 병력으로 선제타격하는 북한군


518 광주사태에 있어서 북한군의 기본전략은 폭동을 야기해 군중들이 한국군 무기고를 습격해서 무장을 한 민중들이 무장폭동을 야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군은 518 광주사태를 야기하기 위해서 수많은 작전 계획을 수립 후 가장 타당한 방법을 선택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선택된 작전계획을 위해서 가동이 가능한 병력과 남한에 있는 모든 고정간첩들을 광주로 집결시켜 준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준비를 위해서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는 것도 의미를 하는 것 입니다.

반면에 광주로 출동한 공수부대는 사전에 북한군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인지하지 못하고 바둑판이나 장기판을 소지하고 광주로 출동을 했을 정도였으니, 출발 단계의 준비상태 자체가 비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무방비의 공수부대에게 유언비어 살포로 군중을 흥분상태로 만들어 놓고, 또 공수부대를 기습타격해 흥분상태로 만들고, 518 광주사태를 통해서 이적행위에 앞장섰던 광주 계엄관할 31시단장이 철저한 진압과 끝까지 쫒아 체포라는 진압 기본방침을 명령해 숫적인 열세와 정보의 열세에 있는 공수부대가 과격하게 진압을 하도록 북한군의 전략의도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북한군 작전에 말려 강경진압을 하는 공수부대


1.  남북한 병력의 비교 


북한 특수부대 600명, 고정간첩 1,000명,                           공수부대 : 600명
김대중 사조직 1,400명

위에서 보듯이 북한군은 처음부터 철저한 준비를 해 놓고 특수전을 벌이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한국 계엄군인 공수부대보다 월등한 병력을 준비하고 518 광주사태를 일으키는데, 이런 병력의 열세에다 곧 이어 이들 선전선동과 금품살포에 빠져든 주민들과 하층민들의 대규모 합세로 심각한 병력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2. 남북한 정보전력 비교 


한국군내 고정간첩과 북한군 통신전문가 상당수    공수부대는 공작을 받는 처지에 놓임
방송요원들 상당수

북한군은 광주에 주둔한 한국군내부에 장성급부터 정보요원과 보안요원들 까지 고정간첩으로 포섭해 놓아 한국 계엄군의 동향을 손바닥 보듯 하면서 소요사태를 야기 진행시키는 입장에 있었고, 반면에 공수부대는 자국땅에서 공수부대란 자긍심만 갖고 무방비 무대책으로 진압작전에 임함.

3. 북한군의 한국 공수부대 선제 타격


이러한 상황속에서 북한군은 전남대 정문에서 20배 정도의 우세한 병력을 동원해 경비중인 공수부대원 8명 정도를 돌맹이를 던져 중상을 입게 해놓고 전격적으로 도주를 해 매를 맞은 공수부대를 더 격분하게 만들어 놓고, 작전계획대로 31사단장이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 주둔지로 가서 매를 맞고 사기저하 된 공수부대에게 특전사가 매나 맞고 다닌다고 비아냥 거리면서 강경진압으로 철저하게 시위를 봉쇄하고, 시위자는 끝까지 쫒아가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려서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을 더 흥분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4. 군중들을 더 흥분시키는 북한군들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를 선제타격하고 시내로 진출한 북한군 2제대은 곧 바로 시내에서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가 학생 100명을 때려 죽였다고 소문을 퍼트리면서, 이미 북한군 1제대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여학생 유방을 잘랐다, 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패대기 쳤다 는 소문으로 흥분한 군중들을 시위로 끌어 들입니다.

이 시위대를 흥분시키기 위해 잘 훈련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은 화염병으로 파출소를 불태우고 경찰을 공격해 군중들이 우세함을 인식하게 해 더 많은 군중을 끌어 들이고, 곧 이어 진압하러 나온 공수부대와 군중들이 맞 부딪히게 만들어 광주시내를 피바다로 만들고 불바다로 만들어 놓습니다.

5. 흥분된 시위대에 잔혹한 진압을 하는 공수부대 


보병장군에게 강력진압 명령을 하달 받은 공수부대원들은 그런 것들이 북한군의 작전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미리 짜 놓은 바둑판식 시위대 시위를 병력부족으로 진압을 하면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또 선제타격 당한 복수심에 불타 명령을 받은대로 끝까지 쫒아 가 무자비한 구타를 가하게 되는데, 이를 목격한 광주 시민들은 이미 시내에 나돌던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게 되어 대항을 하게 대면서 피바다가 되는 참극을 맞게 되는 것 입니다.

북한군 지휘부는 이런 상황을 다 모니터링 하면서 한국군 고정간첩을 통해서 시위진압 상황을 파악해 시위확산 계획을 수립을 하고 시체 장사를 통해 더 많은 군중들을 동원할 계획에 착수하게 되는 것 입니다.

6. 40년이 지난 후 면밀한 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 


북한군은 사전에 충분한 작전계획을 세웠고, 충분한 병력을 동원했고, 한국군의 통신상황을 감청을 하거나 한국군내 고정간첩을 통해서 통신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해 작전에 활용을 하는 반면, 한국군 공수부대는 오히려 한국군 고정간첩의 공작에 말려 강경진압에 나셨다가 두고 두고 오명을 뒤집어 쓰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전라도 광주에 주둔을 하면서 광주지역 계엄업무에 충실해야 할 전교사와 31사단은 무기고 경비를 하지 않고, 방산업체인 아시아 자동차 경비도 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기에 당연히 해안경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자동차 피습 시에는 12시간 이상을 북한군의 전투야전공병 작업을 방치하고 추가 투입되는 20사단 지휘부가 북한군이 기습을 위해 대기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 북한군의 기습을 도왔던 것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확인 되었기에 18일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은 북한군의 전략에 말렸다는 것이 확인이 되는 것 입니다.



2019년 5월 31일 금요일

【518. 광주에서 남북한의 병력과 정보전 전력비교】


518 광주사태의 종결을 보면, 사태기간 내내 남북 군의 병력과 정보전은 한국 군대의 지독한 열세 속에서 진행되어 한국군들은 많은 피해를 보게 되고, 심지어 아군들 끼리 오인사격이란 허울 속에서 상당한 전력이 손실되기도 하지만 끝내 군내 고정간첩의 기만전에 걸려 오인사격으로 종결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한국의 영토 안에서 정부의 합법적인 진압명령을 받고 투입된 진압군들이 북한군의 정보전력의 우세속에서 북한군들에게 맞아 죽고 장비를 빼앗기고 쫒겨 다니면서 심지어 장군이 옷을 다 벗기고 알몸으로 산속으로 도주를 하는 등의 치욕을 받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반역집단으로 매도되고, 북한군들은 자신들의 공을 모두 김대중 사조직에게 넘기고 헌법수호기관이란 칭호를 받게 하고 북한으로 모두 귀환해 영웅칭호를 받습니다.

1. 남북한 병력의 비교 


남 : 7공수 2개 대대 600명 광주 진주

북 : 특수군 600명, 고정간첩 1,000명, 김대중 사조직 1,400명

2. 정보통신 장비


남 : 통상적인 통신장비를 구비하고 보안부대에는 통신감청 장비도 보유 함
     정상적인 통신부대를 운영하게 하고 관리 됨.

북 : 모르스 부호를 사용하거나 남한의 무전기를 빼앗아 사용 함.
      남한군대에 통신부대 요직에 휴민트를 운영하고, 통신부대를 통합관리하는 우수한 능
      력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음.

3. 정보통신 부대 활용 능력


남 : 북한군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관계로 통상어로 교신을 하므로 작전이 노출되어
     작전중 심각한 타격을 종종 입게 됨.

북 : 처음부터 통신감청과 통신통합관리 부대를 배치하고 여기에 휴민트 조직까지 합동작전
     을 하므로 남한군대의 활동을 손바닥 보듯 보면서 작전을 하므로 기획했던 전략을 성공
     적으로 마치고 수습과 대책까지 철저하게 성공시키고 철수를 함

4. 역정보 역공작 공작능력 


남 : 적 존재 자체를 몰랐기에 적전술에 대한 대비 자체가 없어 역공작 대상이 없었음.

북 : 처음부터 준비하고 계획했던 작전계획을 갖고 있어서, 한국정부 군 정보기관의 정보탐
     지 노력을 무력화 시키고 여기에 역정보를 흘려 역공작까지 하므로 한국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줌




2019년 5월 28일 화요일

【518, 21일 집단발포의 비밀을 다 풀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518때 광주시민들을 집단발포로 학살했다고 하면서 집단발포를 해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발포 명령자를 찾는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국회에 518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해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면서 온갖 방송언론매체를 동원해서 가짜 증인들까지 동원해 발포명령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중입니다.

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발생했던 특전사의 사격은 전교사의 사격여건 조성, 31사단의 탄약 공급, 특전사의 자위발포, 북한군의 광주시민 학살과 시신 바꿔치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이런 사실은 재판기록을 근거로 발표를 하는 것이므로 조금도 편향적이거나 허위적인 왜곡이 전혀 없음을 알려드리면서, 이 발표로 518 집단발포 이야기는 다시는 이 땅에서 없었으면 합니다.



1. 특전사는 20일 밤 전교사에 의해 육본에서 철수허가를 받은 부대였습니다. 


특전사는 20일 밤 8시 전교사에 의해 광주시내에서 철수를 하도록 육본에 건의되어 육본에서 재가를 받았던 부대였지만, 전교사는 이 사실을 특전사에게는 숨기고 특전사가 21일 오후 1시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전멸하도록 이을설에게 정보를 제공해 총공격을 하도록 하고, 전남도지사에는 특전사 12시 철수설을 공작을 해 도지사가 흥분한 시위대에게 특전사 12시 철수설을 흘려, 12시부터 광주 시위대가 극도로 흥분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도지사의 방송을 들은 특전사 현장 지휘관들이 전교사에게 철수확인 요청하면 현장을 사수하라고 육본지시와 전혀 다른 이적행위를 반복했기에 특전사는 죽음의 위기에 몰려서도 철수를 하지 못하고 도청사수를 하게 되는 것 입니다.

2. 육본과 합수부 보안사 요원 광주에 파견도 허사로 돌아가다.


육본과 합수부는 여느 때 시위양상과 또 다른 곳의 시위양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폭동상태의 시위를 수상하게 여겨 보안사 요원 20여명을 20일 밤 광주로 파견을 하는데, 전교사와 31사단은 이을설의 북한군이 광주 외곽에서 벌이고 있었던 아시아 자동차 진입로 절단 공사와 장애물 설치 작업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광주 시내에서 극에 달하는 폭동을 야기하면서, 광주에 있는 보안부대 고정간첩이 합수부 요원 20명을 광주시내에 몰아 넣고 외곽으로 나가지 못하게 공작을 하는데, 지금 이 합수부 요원 20명을 편의대라고 모략질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날 합수부 요원 중 단 1명이라도 광주 외곽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한군의 야전전투공병작업을 알아챘다면 518 광주사태는 끝났고, 북한군 600명은 모두 생포되거나 사살 되었을 것 입니다.



3. 31사단, 철수하면서 특전사에게 탄약 1기수 주고 가다.


전남 도지사가 폭도들로부터 도청으로 가해지는 LMG30과 M60 사격에 겁을 먹고 헬기를 타고 도주를 하면서 방송으로 공수부대 12시 철수설을 흘리게 되는데, 이때 도청의 비밀서류를 헬기에 싣고 철수를 하던 31사단 장교들이 공수부대 장교들에게 M16 탄약 1박스를 주고 가 버리는 것이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나타납니다.

이 탄약은 잠시 후 오후 1시에 이 탄약을 지급받은 신동국 중위에 의해 사격이 되는데, 이 사격이 두고 두고 집단발포로 매도가 되고 있는데, 이때 31시단 장교가 특전사에게 주고 간 탄약이 불법적이고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탄약 200발을 주고 간 이유는 첫째 탄약박스가 기본량이 200발인데, 이걸 뜯어서 10발이나 20발을 주고 갈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대량으로 보급을 해 줄 수도 없었고, 최소량만 주고 간 것인데, 잠시 후 북한군의 사격으로 몰살 당할 공수부대가 빈총으로 있다가 몰살을 당하게 되면 나중에라도 후환이 생기기 때문에 탄약 1박스만 주고 간 것이며, 실제로 이 탄약 10발씩 받았던 젼열의 특전사 장교들이 사격을 한 것 때문에 공수부대가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는 시민들을 공수부대가 무릎쏴 서서쏴 자세로 학살을 했다고 두고 두고 모략을 받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탄약을 장교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아무나 막 주고 받고 할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 군대의 탄약인데, 31사단 장교가 왜 임의로 이 탄약을 상부의 허가도 없이 자의적으로 주고 갔을까요?

지금, 집단 발포 명령자를 찾는다는 문재인은 바로 이 31사단 장교를 잡아서 누가 탄약을 주라고 했는가를 주리를 틀면 집단 발포 명령자는 쉽게 찾아지는 것 입니다.

이렇듯 탄약은 지휘계통의 정식 명령 없이 임의로 주고 받을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까지 31사단 장교가 임의로 자의로 주고 간 탄약 1 기수 한 상자를 어느 누구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습니다.



4. 특전사 31사단 실탄으로 발포를 하다.


김일성의 교시로 내린 오후 1시에 특전사를 몰살을 시켜야 하는 북한군 입장에서 아직도 충분한 무기가 도착되지 않아 사격으로 특전사를 선제공격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용화기를 장착한 트럭에서 도청을 향해 중앙선을 달리면서 중앙선에 집중사격을 가해 도청 앞 도로가 총격으로 다 패이고, 도지사를 협박하기 위해 도청에 간헐적으로 사격을 할 정도인 상태였고, 일부가 카빈을 소유하고 특전사에게 사격을 가해 장교 1명이 뺨을 스치는 부상을 입는 정도의 전력뿐 이었고, 동아일보 기자가 이 장면을 목격해 국회에서 증언을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후 1시가 되자 장갑차가 공수부대에게 질주를 해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하게 된 후, 재차 대형트럭과 버스 백여대가 일제히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아 대면서 질주해 오자 신동국 중위가 복면을 하고 트럭을 몰거나 목도리를 하고 버스를 모는 등의 특이한 복장의 북한군 12명을 31사단에서 공급한 실탄으로 조준 사살 했다고 증언을 수십번을 했습니다.

이 사격으로 특전사는 몰살을 면하지만, 두고 두고 집단발포라고 모략질을 받으면서 지금은 집단학살자로 규정되어 있는 처치에 있는 것입니다.



5. 북한군의 광주시민 학살 61명, 그 학살을 특전사에게 뒤집어 씌우다.


특전사 조준사격으로 전열에 있는 대형 차량들이 운행을 못하고 정치를 하게 되자, 공수부대에 대한 차량공격을 할 수도 없고 실탄사격을 가해오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북한군은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특전사도 이런 상황을 이용해 도청 안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소강상태가 이루어지고 전열에 정차되어 있던 차량의 특이한 복장의 운전사들 시신들이 다 사라지게 되고, 최종적으로 그날 24시간 내내 북한군에게 총격으로 피살되거나 칼로 살해되거나 사고로 살해된 광주시민 61명의 시신들이 특전사 사격으로 죽은 선량한 광주시민으로 둔갑되고, 온갖 언론매체들은 광주사태 전기간에 걸쳐 죽은 시신들을 다 모아 방송을 해대면서 특전사가 학살을 했다고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 입니다.

<결론>

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의 비밀은 북한군의 특전사 전멸 작전계획의 차질로 인해, 31사단의 공작에 의해 실탄을 지급받았던 공수부대가 자위적 발포를 한 것을, 그 당시 모든 정보를 장악했던 북한에 의해 공수부대 집단발포로 모략을 당하면서, 남한의 고정간첩들에 의해 선전 선동되고 있는 것 입니다.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518,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 북한군의 전위대가 된 학생들】


정문앞에서 시비를 걸었던 학생들 수명, 여기서 이들의 재가를 받습니다.


이들과 함께 전남대 정문에서 돌맹이를 던졌는데, 나중에라도 이들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518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그리고 모든 증언과 진술을 살펴보면 1980년 5월 18일 아침 9시 30분 경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교에 등교를 하겠다고 정문을 경비하는 공수부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20여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공수부대 지휘관이 핸드 마이크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귀가하라고 하면서 해산을 종용하였고, 해산을 하려고 달려드는 공수부대원들을 피해서 대학생 200여명이 돌맹이를 던지고 시내로 도주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18 재단측에 기재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실랑이를 했다는 학생들의 실명들이 기재되어 있기도 한데, 이 실명 기재된 학생들은 몇 일 후 북한군에게 도청이 점령 당하고 시민군 본부가 도청에 차려지고 학생수습위원회가 발족됐을 때 수습위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 518 관련 모든 기록물에는 1980년 5월 18일 아침 9시 30분 경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등교를 하겠다고 학교에 왔던 학생들 250여명이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벌여 518이 시작되었다고 확실하게 기재를 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518 수사기록은 처음부터 북한군의 광주잠입을 은폐할 목적과 의도를 갖고 수사를 한 것이기에 사실을 조작하거나 은폐하였다는 사실을 밝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전남대 정문에 모인 사람들이 학생임을 검증 했는가?


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인근에 모여 있다가 정문에서 공수부대원들과 시비를 벌이면서도주를 시작하자 가방에 준비해 온 돌맹이 1,000여개를 공수부대원들에게 정통으로 던져 맞추어 공수부대원 8명 가량에게 중상을 입혀 도주하는 학생들의 추적을 저지했던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전남대학생이라는 신분증 검사를 누가 했는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공수부대원들이나 수사관들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서 이들의 신분을 확인 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전남대 정문 앞에서 돌맹이를 공수부대원들에게 던졌으니까 전남대학생들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은 518 역사를 왜곡하는 첫걸음인 것 입니다.

2. 일요일 날 수백명씩 등교를 하는가?


80년 5월 18일은 일요일 이고, 그것도 전국 계엄령이 선포된 첫번째 일요일인 동시에 수배된 학생들이 모두 다 도주를 해서 시위를 주동할 만한 주동자급 학생들이 한 명도 없던 일요일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전국 계엄령이 내린 첫날 그것도 일요일에 학교에 간다고 수백명이 학교로 가서 정문을 경비중인 공수부대원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을 해 시비를 하고, 경비병들이 쫒아 나오자 돌맹이들 들고 미리 대기를 하는 일당들이 있는 곳으로 도주를 시작하고, 사전에 가방에 돌맹이를 잔득 담아서 도주로에 대기를 하고 있던 젊은이들 200여명 가량이 기막힌 솜씨로 무섭다고 피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정통으로 돌맹이 1,000여개를 맞추어 중상을 입히고, 바로 시내로 도주를 하면서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 100명을 때려 죽였다 하면서 소문을 퍼트립니다.

이런 신출귀몰한 젊은 사람들이 일요일 날 공부를 하겠다고 학교에 등교를 하려던 학생들의 모습이라고 믿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 입니다.

3. 정문에서 시비를 걸었던 학생들은, 21일 밤 도청에서 돌맹이를 던졌던 사람들의 명령을  받습니다. 


아무리 수시기관에서 518때 광주에 북한군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사실조작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꼬리를 잡히게 됩니다.

518 재단측 기록 또는 518을 민주화라고 홍보를 하는 방송들은 5월18일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에게 시비를 걸었던 진짜 전남대생들 실명을 거론을 하지만, 이들은 21일 저녁 북한군 지휘관 이을설이 여장을 하고 찦차에 선탑을 해 북한군 600명을 아시아 자동차에서 약탈한 군용차에 무장을 한 상태로 인솔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3중 경계망을 펼친 후 광주시민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모두 다 학생수습위원들이 되어 3중 경비망이 쳐진 도청에 북한군의 확인을 거치면서 시민군 본부가 있는 도청으로 들어서 이을설에게 수습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재가를 받기 시작 합니다.

이 사실은 518이 종료되어 체포된 후 조사를 받을 때 조서에 기재된 내용으로서 피의자는 왜 도청에 들어가 폭도들에게 재가를 받았나요 등등의 사실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4. 처음부터 북한군 존재를 알고 협조한 것 입니다.


위 사실은 5월18일 전남대 정문에서 시비를 걸던 학생들 수명은, 돌맹이를 던졌던 200명이 전남대생은 아니고 최소한 연고대생 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18일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차량 2대가 북한군에 의해 탈취되고, 19일 나주에서 무기고가 털리고, 20일 밤 방송국과 세무서가 불타면서 조직적인 계엄군에 대한 공격양상을 봤고 같이 행동을 했다는 점과 5월27일 어린 학생들에게 총기를 쥐어주고 모두 다 도청에서 살아 나온 점을 상기하면, 연고대생이 아니라 북한군인 것을 사전에 알고 518 광주사태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5. 결론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군인 공수부대에게 돌맹이를 던졌던 괴한들 200며명은 전남대생들이 아니라 광주 유동3거리에 주둔했었던 북한군 제2전대 300명중 200여명 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