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31일 수요일

【518 역사강의 –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내 소요 시작도 조작】


광주사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새롭게 전술적 개념으로 무장을 하신 독자님들께서 518 역사강의를 사건 발생 시간에 맞추어서 들으실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발생을 시간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조사가 미흡했는지 그리고 그런 미흡한 조사가 고의적이었는지도 각자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의 발발이 전남대학교 앞에서 오전에 등교를 하겠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충돌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고 있고, 수사기록에도 그렇게 기재가 되어 있음을 아실 것 입니다.

그런데,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고, 또 계엄령이 확대된 첫날인데, 이날 어느 학생들이 학교에 가겠다고 나설 것이며, 또 나섰다고 해도 공수부대원들에게 수백 명이 사전에 준비해 온 책가방에서 돌맹이를 꺼내 등교를 저지하는 10여명 정도의 공수부대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를 따져 봐야 하는데, 이날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한 공수부대원들이 학내에 있던 학생들을 모두 내 보내거나 수배학생들은 경찰에 인계를 한 상황이었고, 수배된 운동권 학생들은 모두 도주를 했거나 서울에서 열렸던 전국 대학생 회의에 참석을 하고 광주에 없었기에 운동권 학생들도 없었고, 학생간부가 없었던 상태에서 어떻게 불시에 공수부대원들을 향해서 정통으로 돌맹이들을 던져서 심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되어 추적하자 광주시내로 도주를 한 이후 시내에서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었던 전남대 앞 사건에서 학생 100여명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살포할 수 있을까도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이들 학생들의 신분증을 조사를 했습니까?

단지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교에 들어 가겠다고 말했고, 가방에서 돌맹이를 꺼내 던졌다고 해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공수부대를 공격한 사람들이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으로 확인을 해주었던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사실은 손톱만큼도 조사를 해 본 사실조차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시내로 도주해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여대생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하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파출소를 공격해 불을 지르고 소요를 확대해 나가자 31사단장은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 주둔지로 와서 시위를 철저하게 진압하고 시위자는 끝까지 추적해 체포하라고 지시를 했고, 그 이후 시내에서 경찰은 군대에 진압을 요청을 하고, 매를 맞고 많은 병사들이 심각한 부상 상태로 있던 공수부대원에게 31사단장이 직접 강경진압을 명령하고, 북한군 특전대 요원들이 학생으로 위장하고 고정간첩 1,000여명이 요소요소에서 이들 북한군 시위 유도요원들을 보호하는 가운데, 북한 시위 유도요원들 배치와 공수부대 배치를 다 알고 있는 진압 책임부대인 전교사에서 어떻게 시위 진압을 유도했고, 북한군 시위 유도요원들은 사전에 다 교육과 훈련을 받고 진압하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도록 유도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라면 경상도 군인들만 골라서 편성된 부대가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임에도 영상을 분석해 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막 퍼트리면서 군중을 선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실로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4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1980년 광주시내에는 600명의 북한 특수군들이 시위 유도 요원으로, 1,000여명의 고정간첩들이 이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그리고 진압을 지휘하는 전교사와 31사단 장성들이 북한군 작전 의도대로 진압군을 다루었지만, 정작 진압군은 600명의 병력에 불과해 적은 병력으로 넓은 지역에서 폭동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유도하는 북한군 시위유도 요원 작전에 말리면서도, 계엄 지휘부 장성들이 북한군 작전대로 의도적인 지휘를 하는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명령대로 움직여 휘발유에 불을 지르는 방식의 진압을 하므로 북한군 작전대로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북한군 600명, 지원하는 고정간첩들 1,000여명, 한국군 장성들을 포함한 고위장교들의 북한군 협조 사항이 사실로 밝혀진 지금, 필자가 확인한 5월 18일 광주의 시위 상황은 가설이 아닙니다.

이날 아침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시비를 했던 광주의 대학생 일부는 이을설이 강점한 도청에서 학생수습위원이 되어서 활동 한 것을 확인 했는데, 이들 학생들은 이런 사실로 보아 처음부터 북한군과 함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5월 18일 전남대 앞에서 충돌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학생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고, 40년이 지난 이후 모든 상황을 확인해 본 결과 북한군 2제대 300명이었고, 공수부대에게 명령했던 전교사와 31사단 장성들은 아시아 자동차 기습사건, 20사단 지휘부 기습사건, 무기고 경비포기, 교도소 습격, 주남리 공수부대 기습사건 등등을 확인 한 결과 사실로 밝혀 졌기에, 18일 북한군 시위 유도 작전에 협조를 한 것은 명백한 것 입니다.

따라서, 5월 18일 광주시내에서 벌어졌던 공수부대의 잔혹한 시위진압은 북한군의 광주사태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확인 했다면, 이후 광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도 똑 같은 개념으로 볼 수가 있어서 전남대 정문에서 광주사태를 발생시킨 장본인들이 대학생들이 아니란 것을 이렇게 근거를 갖고 알려 드리는 것 입니다.

2019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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