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6일 일요일

【518,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 북한군의 전위대가 된 학생들】


정문앞에서 시비를 걸었던 학생들 수명, 여기서 이들의 재가를 받습니다.


이들과 함께 전남대 정문에서 돌맹이를 던졌는데, 나중에라도 이들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518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그리고 모든 증언과 진술을 살펴보면 1980년 5월 18일 아침 9시 30분 경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교에 등교를 하겠다고 정문을 경비하는 공수부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20여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공수부대 지휘관이 핸드 마이크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귀가하라고 하면서 해산을 종용하였고, 해산을 하려고 달려드는 공수부대원들을 피해서 대학생 200여명이 돌맹이를 던지고 시내로 도주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18 재단측에 기재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실랑이를 했다는 학생들의 실명들이 기재되어 있기도 한데, 이 실명 기재된 학생들은 몇 일 후 북한군에게 도청이 점령 당하고 시민군 본부가 도청에 차려지고 학생수습위원회가 발족됐을 때 수습위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 518 관련 모든 기록물에는 1980년 5월 18일 아침 9시 30분 경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등교를 하겠다고 학교에 왔던 학생들 250여명이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벌여 518이 시작되었다고 확실하게 기재를 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518 수사기록은 처음부터 북한군의 광주잠입을 은폐할 목적과 의도를 갖고 수사를 한 것이기에 사실을 조작하거나 은폐하였다는 사실을 밝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전남대 정문에 모인 사람들이 학생임을 검증 했는가?


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인근에 모여 있다가 정문에서 공수부대원들과 시비를 벌이면서도주를 시작하자 가방에 준비해 온 돌맹이 1,000여개를 공수부대원들에게 정통으로 던져 맞추어 공수부대원 8명 가량에게 중상을 입혀 도주하는 학생들의 추적을 저지했던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전남대학생이라는 신분증 검사를 누가 했는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공수부대원들이나 수사관들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서 이들의 신분을 확인 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전남대 정문 앞에서 돌맹이를 공수부대원들에게 던졌으니까 전남대학생들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은 518 역사를 왜곡하는 첫걸음인 것 입니다.

2. 일요일 날 수백명씩 등교를 하는가?


80년 5월 18일은 일요일 이고, 그것도 전국 계엄령이 선포된 첫번째 일요일인 동시에 수배된 학생들이 모두 다 도주를 해서 시위를 주동할 만한 주동자급 학생들이 한 명도 없던 일요일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전국 계엄령이 내린 첫날 그것도 일요일에 학교에 간다고 수백명이 학교로 가서 정문을 경비중인 공수부대원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을 해 시비를 하고, 경비병들이 쫒아 나오자 돌맹이들 들고 미리 대기를 하는 일당들이 있는 곳으로 도주를 시작하고, 사전에 가방에 돌맹이를 잔득 담아서 도주로에 대기를 하고 있던 젊은이들 200여명 가량이 기막힌 솜씨로 무섭다고 피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정통으로 돌맹이 1,000여개를 맞추어 중상을 입히고, 바로 시내로 도주를 하면서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 100명을 때려 죽였다 하면서 소문을 퍼트립니다.

이런 신출귀몰한 젊은 사람들이 일요일 날 공부를 하겠다고 학교에 등교를 하려던 학생들의 모습이라고 믿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 입니다.

3. 정문에서 시비를 걸었던 학생들은, 21일 밤 도청에서 돌맹이를 던졌던 사람들의 명령을  받습니다. 


아무리 수시기관에서 518때 광주에 북한군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사실조작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꼬리를 잡히게 됩니다.

518 재단측 기록 또는 518을 민주화라고 홍보를 하는 방송들은 5월18일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에게 시비를 걸었던 진짜 전남대생들 실명을 거론을 하지만, 이들은 21일 저녁 북한군 지휘관 이을설이 여장을 하고 찦차에 선탑을 해 북한군 600명을 아시아 자동차에서 약탈한 군용차에 무장을 한 상태로 인솔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3중 경계망을 펼친 후 광주시민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모두 다 학생수습위원들이 되어 3중 경비망이 쳐진 도청에 북한군의 확인을 거치면서 시민군 본부가 있는 도청으로 들어서 이을설에게 수습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재가를 받기 시작 합니다.

이 사실은 518이 종료되어 체포된 후 조사를 받을 때 조서에 기재된 내용으로서 피의자는 왜 도청에 들어가 폭도들에게 재가를 받았나요 등등의 사실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4. 처음부터 북한군 존재를 알고 협조한 것 입니다.


위 사실은 5월18일 전남대 정문에서 시비를 걸던 학생들 수명은, 돌맹이를 던졌던 200명이 전남대생은 아니고 최소한 연고대생 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18일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차량 2대가 북한군에 의해 탈취되고, 19일 나주에서 무기고가 털리고, 20일 밤 방송국과 세무서가 불타면서 조직적인 계엄군에 대한 공격양상을 봤고 같이 행동을 했다는 점과 5월27일 어린 학생들에게 총기를 쥐어주고 모두 다 도청에서 살아 나온 점을 상기하면, 연고대생이 아니라 북한군인 것을 사전에 알고 518 광주사태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5. 결론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군인 공수부대에게 돌맹이를 던졌던 괴한들 200며명은 전남대생들이 아니라 광주 유동3거리에 주둔했었던 북한군 제2전대 300명중 200여명 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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