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3일 토요일

【518 역사강의 – 518 광주사태 종료 후 북한의 공작도 조사를 해야 합니다.】


518 역사의 진실을 알려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의 광주사태만 연구해서는 안됩니다.

518 광주사태가 끝난 후 광주에서 518 남북한의 군사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북한은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을 5,000명 정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부상시켰다고 주장을 하면서 이런 사실들을 운동권 학생들을 통해서 소위 의식화 운동이란 미명으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살해한 영상들을 비디오로 제작해 비밀리에 대학가에서 많은 대학생들에게 방영을 해 왜곡된 사실을 각인을 시켰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시민들을 톱으로 썰어 죽이거나 도끼로 토막을 내는 장면들을 영상제작하고, 삐라를 만들어 살포를 하고,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들만 골라서 편집해 영상으로 제작해 만들었기에 이런 비디오를 본 사람들 치고 전두환 신군부에게 반감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는데, 다시 정권이 바뀌어 군부정권이 종식되었다고 선전하던 김영삼 정권 때 아무리 광주사태 사망자와 실종자 그리고 부상자 신고를 받아도 일백수십명의 사망자 뿐이 없었고, 다시 광주사태 주인공인 김대중 정권때 다시 신고를 받았어도 그 숫자는 변함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사태와 관련해 자행된 북한의 선전선동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해명이 없었습니다.

왜 518 광주사태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북한 관련설이 주장이 되고, 실제로 북한은 망월동 묘지를 참배를 하고, 북한에서 518 칭호를 수여를 하고 있고, 518 열사묘지가 있는 등 연관이 있는지에 대하여 국내 어떤 기관과 단체 그리고 학자들이 제대로 조사를 한 바가 없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518 광주사태 당시에는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에 와서 광주시민들을 돕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고, 정상적인 시위나 반정부 데모 때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유언비언들이 난무했었지만, 그런 유언비어에 대한 해명이나 수사들은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린 듯 유야무야 지나가 버리고 끝나버렸는데, 그런 유언비어들이 그렇게 끝날 성질의 유언비어가 아니었고, 그런 유어비어만 제대로 조사를 했어도 북한의 관련설 상당 부분은 증명이 되었을 것 입니다.

그런 게릴라 전쟁 식 유언비어를 조사도 하지 않고, 광주사태가 끝나고 북한이 5천명 사망설을 퍼트렸을 때도 나중에 사망자가 확인이 되었을 때 그리고 지금도 북한 주장의 암매장설을 근거로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천명 사망설에 대한 배후는 조사를 하지 않고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는 것임을 확인해 드리는 바 입니다.

지금이야 5천명 사망설을 믿는 국민들이 없지만, 그런 주장을 했던 배경과 사실들을 518광주사태 당시의 유언비어와 연관성을 조사를 해서 북한의 518 광주사태 관련을 증명을 해야 하는 것만이 정부의 할 일이 아닐까 하는데, 정부는 오히려 518 광주사태 언급을 하면 처벌을 하려고 법안까지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은 정말로 나라를 망치고 왜곡된 역사를 정설로 만들어 가려는 북한의 입장을 대신하는 행동 이라고 확신 합니다.

왜 명백한 증거들이 남아 있는 광주사태 5천명 사망설을 조사를 하지 않고 어영부영 끝낼려고 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국민들 스스로가 해서 정부에 압박을 가해 518 재조사에 대한 결정을 끌어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왜 518 광주사태 유공자를 정부가 아닌 지자체가 결정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사도 해 봐야 하는 것인데, 이런 사실 하나 하나가 국민들이 정부를 불신하는 초석이 되어 정말로 국가를 위해서 헌신을 했던 사람들이 국가에 배신감을 느껴 다시는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할까 두려워 지는 것 입니다.

518 진실 찾기 역사는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 때 까지 과정 하나 하나를 살펴 봐야만 합니다. 


2019년 8월 1일 목요일

【518 역사강의 – 5월 18일, 북한군 소요유도 요원들과 한국군 고정간첩 장성들】


북한은 월남이 패망한 이후에 남침을 하기 위해 광분했으며, 베트남 식 통일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도시 게릴라 전 연구에 몰입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과 파리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과 북 베트남 군이 남 베트남에서 철수를 한 후, 정규군을 도시 게릴라로 위장해 남 베트남에 주둔을 하면서 일거에 남 베트남을 없애기 위해 카톨릭 신부들을 동원해 민족, 자주, 독립, 평화 란 단어를 앞세워 상당한 기간을 준비한 것 입니다. 
전면 남침을 하기 위해 남 베트남에서 주둔 중이던 병력이 발각되자 자체적으로 발생한 게릴라들이라고 발뺌을 하는 등 관련을 전면 부인을 하면서, 남 베트남 정부 곳곳에 간첩을 잠입시켜 기습 준비의 강도를 높여 나간 바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북한 대남공작부서에 이 같은 베트남 통일성공사례를 연구를 시키고 훈련을 시켜 북한에 특수부대를 만들고 반복적으로 다시 훈련을 시켜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고로 한국에 권력공백이 발생하자 즉각 남한에 파견해 도시 게릴라 전을 준비시키면서 그 동안 남한에 파견했거나 포섭했던 고정간첩들을 총 동원한 것이 바로 518 광주사태였던 것 입니다.

국민들이나 많은 518 연구가들이 5월 18일 광주사태 발발이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광주에 파견된 북한군들은 북한에서 광주 모형물들을 만들어 놓고 사전에 많은 훈련들을 반복적으로 하고 숙달시켜 남파를 시켰고, 남한에 있는 고정간첩들 뿐만 아니라 종북세력을 규합시켜 준비했던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조작한 518 수사기록을 근거로 왜곡된 발표를 하고 있는 것은 518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 반하는 것일 뿐 입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가끔 보는 북한군의 남침훈련 모습에서 남한의 지리가 적혀 있는 이정표 또는 청와대 모형물 들을 만들어 놓고 반복적으로 기습 침투 파괴를 하는 모습을 봤듯이, 광주에 남파된 북한군 600명도 광주의 모형물을 만들어 놓고, 작전을 해야 하는 곳의 모형물을 만들어 놓고 이정표를 만들어 놓고 반복적이고 되풀이 하는 훈련으로 작전대상 지형에 대해 감각적인 숙달을 했다는 것을 518 광주사태 당시 발생했던 각각의 사건을 분석해 본다면 누구나 다 확인이 가능 합니다. 

가령 5월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에게 돌맹이를 던지는 작전 전개와 도심 목적지로 정확히 가서 사전에 교육받은 유언비어를 신속하게 유포하는 것, 아시아 자동차 대형 주차장에 600명이 끊기지 않은 길을 이용해 침입해 생면부지 장소에서 10초당 차 한대씩 출동시킨 점 등등 을 보면 북한군들은 사전에 충분히 훈련과 교육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월 18일 광주사태가 전개 될 때 단 한 명의 북한군이 체포되지 않고, 북한군의 의도대로 광주시내가 불바다가 되기 시작하면서 피바다를 이룬 것은, 북한군과 고정간첩들의 철저한 사전 훈련으로 소요 유도 요원들과 그들의 도주와 작전을 엄호하는 요원들이 있었던 것이고, 이런 모든 정보를 북한군 지휘관인 이을설이 한국군 고정간첩 장성들을 활용해 진압군의 진압작전 까지 세워서 움직였기에 가능한 것이지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광주사태가 발생했다면 우왕좌왕 하면서 5월 18일 광주사태는 실패했을 것이고, 실제로 광주사태 이전 까지는 공수부대를 시위현장에 파견하는 것으로 시위가 종결되었기에 한국군 계엄사령부인 육군본부와 보안사령부는 단순 판단을 했었던 것 입니다. 

 한국군에서 최고로 훈련이 잘되어 있고, 진압능력이 뛰어났던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서 북한군이 의도한 대로 시위에 가담했던 광주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해서, 민심을 이반하게 만든 것이 바로 북한군 도시 게릴라 전쟁의 기본적인 전략에 공수부대가 걸려 들었다는 것이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확인을 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을 유도하기 위해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전남대 정문에서 대학생 100명이 죽었다, 여대생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등등의 유언비어을 살포한 것만 봐도 18일은 전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을 시키고, 공수부대원들을 먼저 때려서 부상자들을 다량으로 만들어 악에 바치게 만들어 소요 유도 요원들의 함정에 빠지도록 한 것이며, 확실한 작전을 위해 31사단장이 직접 악에 바친 공수부대 장병을 앞에 나서서 작전명령서가 아닌 구두로 연설을 해 끝까지 쫒아 가 체포해 오고, 시위는 철저하게 진압하라고 분위기까지 띄운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요가 시작되고 진압이 시작되자, 북한군과 한국군의 작전계획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북한군 사령관인 이을설이 도시 게릴라 전법대로 작전을 하므로써 진압군인 한국군은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 북한군의 의도대로 5월 18일 광주의 하루가 가게 된 것 입니다. 

2019년 8월 2일 강의 


2019년 7월 31일 수요일

【518 역사강의 –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내 소요 시작도 조작】


광주사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새롭게 전술적 개념으로 무장을 하신 독자님들께서 518 역사강의를 사건 발생 시간에 맞추어서 들으실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발생을 시간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조사가 미흡했는지 그리고 그런 미흡한 조사가 고의적이었는지도 각자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의 발발이 전남대학교 앞에서 오전에 등교를 하겠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충돌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고 있고, 수사기록에도 그렇게 기재가 되어 있음을 아실 것 입니다.

그런데,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고, 또 계엄령이 확대된 첫날인데, 이날 어느 학생들이 학교에 가겠다고 나설 것이며, 또 나섰다고 해도 공수부대원들에게 수백 명이 사전에 준비해 온 책가방에서 돌맹이를 꺼내 등교를 저지하는 10여명 정도의 공수부대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를 따져 봐야 하는데, 이날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한 공수부대원들이 학내에 있던 학생들을 모두 내 보내거나 수배학생들은 경찰에 인계를 한 상황이었고, 수배된 운동권 학생들은 모두 도주를 했거나 서울에서 열렸던 전국 대학생 회의에 참석을 하고 광주에 없었기에 운동권 학생들도 없었고, 학생간부가 없었던 상태에서 어떻게 불시에 공수부대원들을 향해서 정통으로 돌맹이들을 던져서 심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되어 추적하자 광주시내로 도주를 한 이후 시내에서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었던 전남대 앞 사건에서 학생 100여명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살포할 수 있을까도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이들 학생들의 신분증을 조사를 했습니까?

단지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교에 들어 가겠다고 말했고, 가방에서 돌맹이를 꺼내 던졌다고 해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공수부대를 공격한 사람들이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으로 확인을 해주었던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사실은 손톱만큼도 조사를 해 본 사실조차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시내로 도주해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여대생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하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파출소를 공격해 불을 지르고 소요를 확대해 나가자 31사단장은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 주둔지로 와서 시위를 철저하게 진압하고 시위자는 끝까지 추적해 체포하라고 지시를 했고, 그 이후 시내에서 경찰은 군대에 진압을 요청을 하고, 매를 맞고 많은 병사들이 심각한 부상 상태로 있던 공수부대원에게 31사단장이 직접 강경진압을 명령하고, 북한군 특전대 요원들이 학생으로 위장하고 고정간첩 1,000여명이 요소요소에서 이들 북한군 시위 유도요원들을 보호하는 가운데, 북한 시위 유도요원들 배치와 공수부대 배치를 다 알고 있는 진압 책임부대인 전교사에서 어떻게 시위 진압을 유도했고, 북한군 시위 유도요원들은 사전에 다 교육과 훈련을 받고 진압하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도록 유도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라면 경상도 군인들만 골라서 편성된 부대가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임에도 영상을 분석해 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막 퍼트리면서 군중을 선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실로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4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1980년 광주시내에는 600명의 북한 특수군들이 시위 유도 요원으로, 1,000여명의 고정간첩들이 이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그리고 진압을 지휘하는 전교사와 31사단 장성들이 북한군 작전 의도대로 진압군을 다루었지만, 정작 진압군은 600명의 병력에 불과해 적은 병력으로 넓은 지역에서 폭동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유도하는 북한군 시위유도 요원 작전에 말리면서도, 계엄 지휘부 장성들이 북한군 작전대로 의도적인 지휘를 하는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명령대로 움직여 휘발유에 불을 지르는 방식의 진압을 하므로 북한군 작전대로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북한군 600명, 지원하는 고정간첩들 1,000여명, 한국군 장성들을 포함한 고위장교들의 북한군 협조 사항이 사실로 밝혀진 지금, 필자가 확인한 5월 18일 광주의 시위 상황은 가설이 아닙니다.

이날 아침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시비를 했던 광주의 대학생 일부는 이을설이 강점한 도청에서 학생수습위원이 되어서 활동 한 것을 확인 했는데, 이들 학생들은 이런 사실로 보아 처음부터 북한군과 함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5월 18일 전남대 앞에서 충돌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학생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고, 40년이 지난 이후 모든 상황을 확인해 본 결과 북한군 2제대 300명이었고, 공수부대에게 명령했던 전교사와 31사단 장성들은 아시아 자동차 기습사건, 20사단 지휘부 기습사건, 무기고 경비포기, 교도소 습격, 주남리 공수부대 기습사건 등등을 확인 한 결과 사실로 밝혀 졌기에, 18일 북한군 시위 유도 작전에 협조를 한 것은 명백한 것 입니다.

따라서, 5월 18일 광주시내에서 벌어졌던 공수부대의 잔혹한 시위진압은 북한군의 광주사태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확인 했다면, 이후 광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도 똑 같은 개념으로 볼 수가 있어서 전남대 정문에서 광주사태를 발생시킨 장본인들이 대학생들이 아니란 것을 이렇게 근거를 갖고 알려 드리는 것 입니다.

2019년 8월 1일

2019년 7월 30일 화요일

【518 역사강의 – 원정 시위꾼들은 어떻게 광주에서 먹을 것을 해결했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체가 있는 물체는 무엇인가 섭취를 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졌던 광주사태에서 10일 동안 각종 시위에 참가한 수사기록에 기재된 특정한 세력들이 어디서 어떻게 누가 음식을 제공해서 먹고 지냈는지에 대한 조사는 커녕 언급조차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주목을 해야 합니다.

당시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집에서 밥을 먹고 시위에 참가를 하거나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고 쳐도, 그들이 집에 밥을 먹으러 갔을 때 가족들이 나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을 것은 뻔한 것이고, 실제로 광주사태가 끝나고 계엄당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못살던 어린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마지막까지 도청에서 저항을 했던 시민군들 상당수는 고교생, 재수생, 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을 봐도 정상적으로 광주에서 밥을 먹고 나갔다 들어오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아무튼 수사기관이나 국회 청문회 그리고 각종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할 때 이 부분 즉,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내에서 주거를 하던 사람들이 아닌 원정을 오거나 아예 다른 지역에서 와서 상주를 하면서 시위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지냈는지에 대한 조사는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인간은 밥 한끼만 걸러도 힘을 쓰지 못하고 굶긴 것에 대하여 저항을 한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이 부분에 대한 조사는 반드시 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20만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참가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 상당수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광주 외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상당수는 집으로 돌아 갔다가 안 오거나 다시 오거나 했을 것이고, 아예 상주를 했었는데 그 상주를 했던 부류들의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연고대생 600명과 고정간첩들 1,000여명이랍니다

성인남자들 일인당 백미 200그램 정도를 한끼로 섭취를 해야 하는데, 힘든 시위활동을 밤을 새워서 지속을 했으므로 하루 4끼를 먹었다고 가정을 하면, 1,600명X4X10X0.2=12,800킬로그램의 쌀이 소요되었고, 저 분량의 쌀을 운반하고 밥을 짓고 밥을 날라 주었던 인력을 관리하는 조직이 별도로 있었고, 막대한 비용을 지출을 했을 것인데, 주로 김밥을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 급식에 대한 이야기는 21일 목포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선발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물을 얻어 먹고 밥을 얻어 먹는 사진이 등장하면서 시작되는데, 이런 이야기는 북한 특수군과 고정간첩들의 급식작전을 추진했던 조직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일 뿐 입니다.

또한, 비공식적으로 증언을 하는 518 당시 동원되었던 진압군인들에 의하면, 북한군들은 개인적으로 빳빳한 천원권을 한 다발씩 주머니에 소지했다고 하는데, 당시 택시 기본요금이 500원 정도 할 때 이니까 천원권 한 장이면 식당에서 식사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요즘 북한군이라고 소문이 난 광수를 찾아서 만들었다는 영화 김군 이야기도 광주천변에서 지냈던 1번 광수가 양아치였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관련자 집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는데, 이 점을 우리는 주목을 해 봐야 하는 것인데, 누가 집으로 양아치를 초대해 자주 같이 밥을 먹을까요?

자주가 아니라 3시3끼를 공급을 했던 취식을 담당했던 조직의 일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보고 조사를 해야 하는 것임에도 영화를 만들어 미화를 하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 인 것 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필자는 탈북자들의 518 참전설을 일축하고 있는데, 북한 사람들과 제3국에서 오래 인접해 지내 본 경험과 그들이 절대로 광주에서 어떻게 밥을 먹고 지냈는지에 대해 함구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광주에 온 것이 아니라, 518 광주사태에서 북한군 이야기를 논쟁거리로 만들어 김대중의 광주사태 관여 사실을 숨기려는 공작으로 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을 먹지 않고 살수가 없으며, 먹지 않고 전쟁을 못하고 전투도 못합니다.

자국 땅에서 작전을 했던 공수부대도 몇 일간을 전투식량으로 버티거나 굶거나 했다는데, 적지로 원정을 온 북한군들이 굶지 않고 10일간 왕성하게 작전을 해서 광주를 점령했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 취식을 전담했던 조직을 관리 운영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019년 7월 31일

【5`8 역사강의 –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면 지원부대는 어디에 있었나?】


군대 작전은 전투부대가 출전을 하게 되면 반드시 지원부대가 있어야 합니다,

장규전 부대가 되었던 특수전 부대가 되었던 전투부대가 출전을 하게 되면 반드시 군수지원 부대가 작전을 지원하고, 지휘부가 있어야 하는 것은 군작전 교리상 상식 중에 상식이기 반드시 518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광주에 왔었다면, 이들 부대가 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군수지원을 누군가 했어야 하고, 그 지원의 종류에는 주둔 및 은신 및 기동 그리고 식사 및 정보 전달은 필수였고, 이들 북한군이 작전을 개시하게 되면 작전에 소요되는 소모품을 지원해 주어야 하고, 이들 병력의 사고처리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북한군 600명이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작전을 했을 때 작전부대 600명과 지원부대였던 고정간첩 1,000 여명이 먹었던 쌀이 양이 무려 8톤 정도가 되었는데, 1인당 한끼에 백미 200그램을 산정하고 작전 중 이었기에 일일 4식을 먹었던 것으로 계산하면 그렇게 산출이 되는데, 이 이야기는 누군가는 북한군과 지원부대에게 취사를 고정적으로 담당을 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김대중 사조직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빼앗아 광주로 진주를 할 때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장면으로 방패막이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별도 즉, 북한군 취사와 별개였고, 그런 장면을 계획적으로 노출시켜 북한군의 정규취사 작전을 은폐를 했던 것 입니다.

또한, 북한군과 북한의 통신, 북한군끼리 통신, 북한군과 고정간첩들의 통신을 지원하고 전담했던 지원세력이 있었고, 북한군이 작전에 돌입해 학생들 가방과 돌맹이, 또는 낫과 도끼, 비표시에 사용했던 수건, 아시아 자동차 기습 시 사용했던 도로 절개절단 장비들, 20사단 지휘부 기습할 때 사용했던 장애물 설치 장비 들을 누군가 지원을 했기에 북한군 600명은 작전에 전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은 명백한 것 입니다.

518 광주사태는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북한군의 특수작전 형태에 대하여 많은 교훈과 증거를 남겨 주었고, 북한군의 작전 그리고 북한군의 전남도청 강점 시 통치방식에서 또한 많은 교훈과 물적 인적 증거들을 남겨 놓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그들이 바로 지원세력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군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을 했던 많은 고정간첩들이 그대로 다 노출이 되었으며, 그때 노출된 고정간첩들이 지금도 남한에서 고위직에 올라가 있었거나 올랐던 증거들도 수두룩하게 남겨져 있으며, 이들이 518 광주사태가 종결된 이후 지금까지도 온갖 북한의 대남공작에 앞장서 왔었던 증거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서 작전을 했다는 것은 518 당시 광주에서 가두방송으로 선전을 했었고, 그 600명이 각종 시위에 선동과 앞장을 섰고, 아시아 자동차를 기습을 했고,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했으며, 교도소를 습격했고, 전남도청을 강점을 했었다는 것은 수사기록과 각종 정보 보고서에 고스란히 기재가 되어 있기에 누구나 다 쉽게 알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518 수사기록에서 조목조목 다 북한군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연고대생 600명이라고 불리웠던 집단은 북한군이었고, 그들 연고대생 600명은 별도의 조직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연고대생 600명이 벌였던 각종 사건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들 연고대생 600명이 고정간첩 1,000여명의 지원을 받으면서 광주시내에서 벌였던 특수군사작전 이외에 광주시 외부에서 벌어졌던 사건 즉, 무기고 탈취 사건은 북한군이나 북한군 고정간첩 조직이 아닌 전라도 토박이들인 김대중 사조직 1,400여명이 별도로 동원되어 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북한군 600명이 아시아 자동차에서 10초에 한대씩 출동해 전라남도 17개 시군읍에 있었던 무기고에 차량들이 도착했을 때 즉각 빼어놓은 무기를 북한군이 몰고 온 차량에 적재하고 같이 탑승해 광주로 진입했기에 수사기록에도 동시 다발로 일시에 무기고가 털렸다고 기재가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40년 동안 수사기록에 기재된 4시간만에 17개 시군읍에 있는 무기고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시에 털렸다는 내용을 앞세워 북한군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주장을 해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주장은 군사작전상 전투교리상 인적 물적 시간적 요소들을 감안했을 때 절대로 성립될 수가 없는주장이며, 그런 주장이야말로 518 진실을 왜곡해서 김대중 사조직의 광주사태 개입을 고의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가 진행하는 518 강의는 북한군의 작전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분석해서 확인을 했기에 518의 진실을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019년 7월 30일 강의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518 역사강의 – 518 광주사태 발생의 배경】



< 들어가는 말 >

지금 대한민국에서 518 역사에 대한 분석과 그 분석에 의해 강의되는 내용은 모두 다 518 수사기록과 국회 청문회 기록 등에 기초하고 근거한 내용으로서 빙산의 일각 정도 또는 전혀 잘못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 합니다.

518 광주사태는 단순하게 폭동으로 규정되어 정의되고 있다가 다시 김영삼 정부의 특별법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재 규정 되어 정의되고 있지만, 518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들의 무장과정과 무기소지와 습득 과정이 전혀 조사가 되지 않았고, 무장된 시민들과 진압군의 충돌과정도 부분적으로 조사가 되었으며, 특히 무장된 시민들이 정규군을 기습해 1개 대대병력을 괴멸 시켰던 과정들이 조사가 왜곡되고 재판과정에서 허위진술이 자행된 것에 대한 조사 조차도 되어 있지않고 그대로 역사로 국민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행위라고 여겨집니다.

소위 518 연고대생 들이라고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불리어 졌던 600명의 괴한들에 대한 단 한차례 조사도 없이, 사실확인도 없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역사적 진실로 가르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서 필자는 제대로 된 사실조사를 군사작전 개념으로 전술적인 확인을 일일이 거쳐서 100% 검증을 해 새롭게 국민들에게 518 진실에 대한 역사를 알려 드릴 것 입니다.

518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518 진실을 역사적으로 제대로 밝히는 것에 대한 의무를 기피하고 방치하고, 일개 시민이 역사적 진실을 군사작전개념과 전술적 개념을 대입을 해 확인하는 노력을 탄압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518 진실을 알려드릴 것 입니다.

                   --- 518 광주사태 발생의 역사적 배경 ---

518 광주사태가 발생한 배경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의견을 내고 발표를 하고 있지만, 518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지금에서 사실 확인을 해 보면 많은 미사어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냥 김대중의 정권탈취 욕망과 북한의 적화야욕을 채우기 위한 군사작전을 통한 내란을 야기한 국지적인 게릴라 전쟁이었다고 확신을 합니다.

어떻게 북한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을 할 것이며, 김대중은 왜 집권을 하고 북한에 막대한518 전승비용을 지불했고, 518 유공자를 양산했는지 그리고 양산된 518 유공자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확인 해 본다면 김대중의 북한에 대한 보답행위와 지지일 뿐 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 한 예로서 518 광주사태에 참가한 당사자들은 518 광주사태가 종식된 지 4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963정의 총기와 171,000발의 실탄 또 수백발의 폭발물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지금까지도소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518 광주사태의 배경을 알 수가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518 광주사태는 국가권력의 진공사태 와중에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김대중과 북한측의 군사작전이었다는 것을 518 광주사태 당시 벌어졌던 사건 하나 하나를 밝히므로 증명을 할 것입니다.

              --- 518 광주사태의 구성요소 ---

518 광주사태는 사건발생 당시 광주지역에서 가두방송으로 선전을 했던 연고대생 600명 즉, 북한군 600명과 수사기록에서는 밝혀지지 않거나 밝히지 않았던 고정간첩 1.000여명과 김대중 사조직 1,400명이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주축이었고, 그 반대쪽에는 진압군이었던 공수부대와 20사단 병역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대에게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하나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가는데, 이러한 사건의 전개에는 반드시 518 광주사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들이 꼭 등장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런 사건 전개를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가면, 구성요소들이 명백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이런 확인된 사실에 근거 해서. 1980년 5월 18일 518릐 사건 전개부터 강의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7월 25일 목요일

【518 진실 주장, 우익들의 이야기는 맞고 좌익들의 이야기는 틀린가?】



518 진실주장을 함에 있어서 우익들은 우익들의 주장이 맞고 좌익들은 좌익들의 주장이 맞다고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익들과 좌익들의 518 진실 이야기는 각각 다 맞는 것일까요?

좌익들의 518 진실주장은 518 당시부터 유언비어로 속았고, 이간질로 속았고, 같은 고향인 점을 이유로 사실을 알아도 말을 하지 않고 주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에 진실 주장과는 거리가 있고, 피해 사실과 규모도 피해를 당한 것은 맞지만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틀린부분이 상당히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익들의 518 진실주장이 맞는가 하면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익들은 북한군이 광주사태에 개입을 했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미 518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가두방송으로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로 내려와서 광주시민들을 돕고 있다고 광주에서 시위당사자들이 주장을 했는데, 그런 사실을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알아 낸 것처럼 주장을 해서 오히려 시위당사자들이 북한군 광주 개입설을 강력하게 부인을 하는 기폭제를 만들어 준 결과를 초래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광주사태는 북한군과 김대중 사조직의 합동작전이었음에도 북한군 이야기만 꺼내므로 인해서 정작 핵심인 김대중 사조직은 아예 물밑으로 가라앉아 존재감 마저 잊어지게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518 진실 주장은 좌우익 모두 가 다 틀리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을 하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가는 국민들 의식 수준이 따라와 주어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