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토요일

【518, 교도소 습격은 북한의 또 다른 프로젝트】


518 광주사태의 전모는 김일성 등 북한 대남공작부만 알고 있을 것이지만, 40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증언들을 통해 나름대로 518의 기본적인 구성은 알아낼 수가 있는데, 군중소요, 군중무장, 교도소 습격, 무장반란 확산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교도소 습격 프로젝트인데, 분명한 것은 교도소 습격을 전담한 특별한 부대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 프로젝트는 북한이 직접 지휘했다는 것입니다.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부대 습격 이전에 새벽부터 경상도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살포 했듯이, 20일 밤부터 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유언비어를 살포했고, 이 유언비어는 교도소 직원들 가족에 의해 의도적으로 교도소로 알려지고, 이 소문을 근거로 21일 새벽 2시경 31사단 정웅이 직접 병력을 교도소에 파견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팩트이고, 교도소 습격은 21일 오전 8시부터 1차 정찰을 시작하면서 23일 습격이 끝나는데, 끝나는 그 시점은 북한에서 직접 광주로 온 북한군 중장이 전남도청에서 이을설에게 철수를 지시한 다음이라는 것은 명백 합니다.

20일 밤에 교도소 습격설이 퍼졌음에도 시내에 있던 합수부 보안요원 20명은 이를 놓쳤다는 것이 의문이고, 그 시간은 MBC 방화, 광주세무서 방화등 시위가 격화되던 시기였고, 31사단장 정웅이 병력을 교도소에 파견한 시간인 새벽 2시는 바로 아시아 자동차 진입로가 절개절단 되고, 톨 게이트 입구 도로에 장애물 설치와 도로 부분 절개절단 작업이 북한군에 의해 진행되던 그 시간임을 상기한다면 정웅 31시단장의 교도소 병력 파견 과정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입니다.

이 사실은 정웅 31사단장은 교도소 습격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일 수가 있고, 2차 정찰 시간인 아침 9시경 버스 1대에 100여명이 탑승해 교도소 입구 정찰을 하고 설탕고지를 정찰한 사실은 이후 설탕고지 전투에서 많은 북한군이 사살된다는 점과 일치하고. 교도소 습격을 한 병력은 무기운송을 한 병력과 또 다른 병력이란 점과 일치하는 것인데, 아침 9시경에는 또 다른 버스 6대에 또 다른 300명이 아시아 자동차로 가서 합류를 했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똥별 31사단장 정웅과 20사단 박준병은 자신들이 교도소를 경비할 때는 습격을 받지 않고 공수부대가 주둔을 했을 때만 습격을 받았기에 교도소 습격은 공수부대의 조작이라는 진술을 하지만, 31사단이 경비를 할 때는 북한군이 중무장이 안되었을 때고, 20사단이 경비를 할 때는 북한군 중장이 이을설에게 철수지시를 끝냈을 때였기에 북한군은 직접 교도소를 공격할 수 없기에 그랬던 것 입니다.

만일 교도소 경비를 특전사가 아닌 31사단이 했다면, 그리고 북한군 공격에 짜고 치듯 방어가 뚫리면서 그때를 노려 일부 좌익 교도소 직원들의 활동으로 교도소 내부에서 동시에 폭동이 일어났다면, 광주 교도소는 북한군 수중에 넘어 가 광주사태의 흐름은 또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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