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6일 수요일

【5.18 광주사변, 5.27 광주사태 이렇게 불러야 국민들이 제대로 알게 됩니다.】


5.18 광주사태라고 명칭을 붙이고 부른다면, 또 그렇게 부르고 있기에 518을 조사를 했던 수사관, 검사들 그리고 판결을 했던 판사들 또 변호를 했던 변호사들 최종적으로 정치적으로 끝맺음을 했던 정치권 간첩 일당들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 5.18의 성격이 쉽게 민주화로 변질이 된 것 입니다.

5월 18일 부터 25일 까지 북한군이 광주에 주둔을 했고, 그들의 지시로 고정간첩 1,000명이 같이 움직여 주었는데 한국 최고이 특수부대인 공수부대가 매만 맞고 쫒겨 다니고 그러다가 1개 대대가 궤멸적 타격까지 받았던, 그때 그 당시 광주의 하루 하루 상황과 북한군이 다 철수를 하고 일부 고정간첩들만 활동을 했던 5월 27일의 상황을 비교 해 보시면, 국민들이 알고 있는 518이 어떤 것이었나를 확연하게 알 수가 있을 것 입니다.

5월 27일 광주 재진입 작전에서 불과 몇 백 명의 공수부대가 도청과 시내에 침투해서, 반란 시민군들을 쉽게 진압했듯이, 부마사태 당시도 그랬듯이, 광주의 18일도 당연히 그랬어야만 했는데, 광주의 18일은 그렇지가 않았기에, 그래서 광주시민들만 있었던 광주와 신원을 알 수가 없었던 괴한들의 무리가 있었던 광주는 달랐다고 자타가 다 인정을 하는데, 이래서 우리는 5.27 광주사태라고 불러야 하고 5.18 광주사변이라고 불러야만 광주의 대량 살인행위와 행방불명 행위를 규명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무장을 한 2천여명의 공수부대와 무장을 한 3천명의 북한군과 고정간첩과 김대중 사조직과 다수의 부랑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살인과 행방불명 결과를 공수부대에게만 뒤집어 씌우기에 행방불명자를 찾지 못하고 살인행위를 규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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