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5일 일요일

【아아! 운명의 5월 21일 오후 1시, 김일성은 분노했다.】

5월21일 운명의 오후1시, 한국군 공수여단을 몰살 시켜야 하는 절대절명의 시간을 놓고 이 을설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김일성의 교시로 하달된 5월21일 오후 1시에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바로 어제 19일 기독교 방송국에서 한국군에게 탈취했던 M16 소총 한정을 확보했어야 하는데 그만 공수부대원들에게 빼앗기고 말았기에, 오늘밤 다시 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칼빈총 2정과 M16 1정을 확보하자, 이을설은 즉각 사전에 지시된 명령을 하달했다.

총을 확보한 1제대 3명이 즉시 작전에 돌입해서 광주 시민 3명을 사살을 했는데, 역시 시신 1구는 19일 밤처럼 확보를 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광주역에서 칼빈총으로 죽인 시신2구는 확보가 되어 즉시 2제대가 있는 유동 3거리로 옮겨 민중동원에 돌입을 하도록 했다.

동시에 평양에서는 즉시 무기확보를 위한 총동원령을 내려, 이을설은 바로 고정간첩 1,000명을 아시아 자동차로 보내서 공장으로 통하는 길 중 하나만 남기고 모든 도로를 절개해 차량진입을 막아 자신의 휘하의 병력이 포위되어도 시간을 벌수 있도록 조처를 했고, 작업이 끝나는 즉시 국군20사단 연대병력의 광주 진입로와 20사단 지휘부의 전교사 진입로에 장애물을 설치하고는 작전대기를 시켰다.

잘 훈련된 고정간첩들에 의해 20사단 연대병력의 광주 진입은 막았고, 뒤이어 장애물 지역으로 진입한 20사단 지휘부 행렬도 노련한 고정간첩 1,000명과 반복 훈련된 2제대의 신속한 공격으로 모든 장비를 확보해 포섭된 국군을 앞세워 절개되지 않고 남아있던 도로를 통해 아시아 자동차로 가서 동지들의 협조로 신속하게 차량과 장갑차를 인수받아 1시간 내로 포위의 위험성을 벗어나 무기고로 향했다.

이을설은 김일성의 교시가 내려 진 오후 1시에 무장을 할 총기를 갖고 도청 앞으로 도착할 자신의 병력을 기다리면서 도청 앞으로 되 돌아 온 고정간첩 1,000명이 계획대로 공수부대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오후 12시가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 지던 중 실탄이 없다고 통보 받았던 한국 공수부대원들의 사격이 시작되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하고 작전을 변경했다.

김일성 교시로 하달 된 오후 1시가 되자, 무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던 휘하의 병력들이 공수부대에게 사격을 개시하고 장갑차 조종수가 공수부대원을 깔아 뭉개면서 버스가 돌진을 하자 공수부대의 사격이 시작된 것인데, 이런 상황에 이을설은 당황을 하고 작전변경을 하면서 군중들 속에 있던 휘하 병력들에게 뒤로 물러나게 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명령을 했던 21일 오후 1시에 자신이 그토록 믿고 아꼈던 특수전대가 20만 광주 시민을 동원해 가두어 놓았던 한국 공수부대를 공격해 몰살시키지 못한 것에 한숨을 쉬었다.

애국시민 여러 분 !!

21일 오후 1시에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공수부대가 집단 조준사격을 했다는 것은 다 조작이고, 북한 측에서 오후 1시에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로 죽였다고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리어카 시신 2구는 20일 밤 광주역에서 MBC에서 탈취한 칼빈총으로 북한군에게 죽은 광주 시민이며, 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광주시내를 돌면서 공수부대가 죽였다고 선전했던 시신입니다.

20일 밤에 이렇게 신속하게 진행되었던 북한군의 군사작전은 한국군 내에 있던 고정간첩들에 의해 보호가 되었고, 한국군내 있던 고정간첩에 의해 아시아 자동차로 기동을 하고, 아시아 자동차 내부에 있던 고정간첩에 의해 1분에 5~6대가 배차와 탑승 출동이란 기록을 세운 것을 39년간 한국에 있는 모든 언론도 수사기관도 정보기관도 속이고 있었던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 애국 시민 여러분들은 반납하지 않고 지금까지 고정간첩들이 손에 쥐고 있는 미반납 총기 963정과 171,000발을 반납하라고 촉구해야 하고,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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